2008년 07월 31일
# by 서찬휘 | 2008/07/31 02:57 | 트랙백 | 덧글(1)
2008년 07월 12일
요즘은 딸기가 갑자기 무진-장 당겨서요. 입이 심심할 때 달달하기 이를 데 없는 딸기잼을 입 안에 한 숟갈 퍼 넣습니다. 단 걸 그리 안 좋아합니다만 왠지 요즘은 이렇게 해서라도 모자란 딸기분(……우와, 어감이 좀 묘해!)을 채우게 되더군요.
딸기잼을 물이나 우유랑 섞어서 믹서에 갈면 맛있으려나요?
# by 서찬휘 | 2008/07/12 21:47 | 트랙백 | 덧글(8)
2008년 07월 06일
http://mahn.co.kr/chat/누구든 들어오세요.
만담(만화 이야기)이 될 수도 있고 덕담(오덕한 이야기)이 될 수도 있고.
# by 서찬휘 | 2008/07/06 00:23 | 트랙백 | 덧글(3)
2008년 06월 27일

이런 이벤트에 당첨되어본 적은 없지만, 되면 좋은 거니까.
근데 신청이 꽤나 까다롭네. 스크립트도 제대로 작동 않는 거 같고. 어쩌란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
프린터 주면 제일 좋고 아니면 나노라도 줘. (……)
나노하를 주면 더 좋은데.
# by 서찬휘 | 2008/06/27 23:58 | 트랙백 | 덧글(2)
2008년 06월 12일
저런 종류 트윈테일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볼 때마다 참 신기해하는 중.
홍대입구역. 6월 11일.
# by 서찬휘 | 2008/06/12 03:00 | 트랙백 | 덧글(2)
2008년 05월 04일
안녕하세요. 만화 중심의 대중문화 언론 『만』 편집장 서찬휘입니다.
5월 4일 23시 30분부터 대화실 '원두막'을 엽니다. 주제도 방향도 없는 자유로운 이야기의 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http://mahn.co.kr/chat같이 밤을 불태우실 분은 들어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난 강하진 않지만, 내 바람은 높은 곳을 날아.
찬휘였습니다.
# by 서찬휘 | 2008/05/04 23:13 | 트랙백 | 덧글(1)
2008년 04월 05일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를 뻔했다. 아니, 나빠서가 아니라.
대사 하나가 유난히 가슴을 헤집네.
린 엄마인 아키가 레이지를 끌어안은 채로 해 주는 말.
"미워하지 마. 미워하면 안 돼.
미워해도 더 괴로워지기만 할 뿐이야.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버려."
"아키 씨는? 용서했어?!"
(회상) '린을 지우라 했거든'
"…잊어버렸어."
한 아이에게 생긴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나이를 먹으면 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의 나이와 가까워지면서 그저 알 수 없는 안쓰러움과 회한 속에서 조금씩 상쇄해갈 뿐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그 트라우마를 자신의 뒷 세대에게 전가하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건 가장 최악의 경우지만.
내게도 강한 트라우마가 있다. 내 피에도 그 피가 흐른다는 점이 너무나 역겨워, 자손을 남긴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심정마저 들 때도 많았다. 아예 일찌감치 정관수술을 받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웃기게도 섹스는 하고 싶어서 대안이라고 생각한 게 정관수술이라니, 지금 떠올리면 웃기지도 않아요. 참.
지금은 어떠냐면, 그나마 다행이게도 나는 늙어가는 내 아버지에게서 이 나라의 중년 남자, 노년 남자의 삶을 보게 된다. 여전히 납득하진 않는다. 용서할 수도 없다. 여전히 나는 내 자식에게 내가 행하게 될지도 모를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내 피도 그 피니까. 나와 내 아버지의 관계는 그런 관계다. 그러나 이젠-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는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렇게밖에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수컷의 모습을, 나 또한 수컷으로서 그냥 자연스럽게 느끼고 마는 거다. 따라해선 안 되지만,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을 향한 이해.
아버지는 자기 또는 자기 세대가 '공격'받는다는 판단이 들 때면 아버지는 5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입에 빨갱이, 전라도, 죽창 같은 소리를 담으셨다. 무언가가 날아가고 깨지고 뒤집히고 큰 소리가 나왔다. 충청도 토박이로 시골에서도 변두리 중의 변두리 마을에서 나 당시 은행원이 되는 입신양명을 이뤘던 우리 아버지로서는 당신이 살아가기 위한 방식 외의 선택지에 무지했다. 그러나 무지한 것 뿐만 아니라 무지의 영역에 자리한 이들을 자신의 길 앞을 막아서는 악으로 규정한 게 문제였다. 아버지 세대에는 물론 아버지와 같이 열심히 일만 했던 이들도 있지만, 총과 최루탄 앞에 피흘리고 쓰러지면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무능한 이 취급하기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조중동 논리로 세뇌했다.
실제로 우리집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다' 봤다. 주간 조선마저 챙겨봤을 정도면 말 다 했을 테지. 충청도 사람이면서도 빨갱이, 죽창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 변명, 자기 변호였던 거다. 그런 판에 난 어머니마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팬으로 전락할 때엔 정말 절망감에 휩싸이고 말았더랬다. 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조차 설득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정치적 논점에 무관심해지라는 요구를 들으면서 분노했다. 정치란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보통 국민으로 살아남기 위해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말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때 되면 넌 네 가족들까지도 죽창으로 찔러 죽일테지? 난 그 꼴 못 본다." 노무현을 선택했고, 탄핵 반대를 위해 지방에서 광화문으로 주일마다 뛰어 올라가던 나를 용납할 수 없었던 거겠지. 정치 이야기가 왜 자꾸 나오냐면, 그 흐름 속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바꿔야 할 대상으로 비치는 것을 도무지 견디실 수 없었던 듯하다. 심심하면 나오는 이야기가 '너희 세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같은 류였으니까. 현재 아무 일도 않고 있는(못하고 있는-일 수도 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분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렸던 나로서는 그 칼 같이 파고 들어오는 독을 도무지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안 그래도 10대 때, 아버지와 나는 방식으로도 무던히 부딪쳤던 바였다. 난 이미 대학이란 데에 별 뜻을 두고 있지 않았고, 내가 필요한 부분은 내가 찾아 익혔으며, 사색을 즐겼고, 책방에 가 책 속에 파묻혀 있기를 즐겼다. 아버지는 1초라도 대학 공부를 하기를 원했고, 내 방식을 철저히 해선 안 될 것 취급을 했다. 나는 학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일례로 내 동생. 내 동생은 소위 공부 계열의 천재다. 어학 능력도 좋아 외국인들과의 대화에 무리가 없을 정도고, 가게 운영을 맡고서는 전국 순위 1등을 몇 차례 먹어치운 괴물 같은 녀석이다. 이걸로 부모님 제주도를 보내드리질 않나, 자기 스스로도 독일로 시찰 여행을 다녀오질 않나. 대견하면서도 무시무시하다.
나와는 궤가 다른 녀석이고, 이런 아이야말로 대학에서 필요한 인재라고 본다. 나는 아니다. 난 어차피 필요하면 내가 내 방식으로 한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결국 그 방식으로 살고 살아서 현재 그걸로 밥을 먹는다. 이제야 아버지는 '포기'를 하셨지만,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나야말로 자기에게서 나온 자식으로서는 안 보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예상 외' '규격 외'였다. 그게 나다. 겨우 학교를 나왔더니, 정작 이젠 삶의 방식에서 부딪치기 시작했다. 지리멸렬한 논쟁이 계속됐다.
내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쓸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는 경제력이었다. 물론 IMF 때 딱지가 집안에 붙고 집을 옮기는 사태까지 겪고 나서는 그나마도 약발이 안 먹히긴 했지만. 나는 몇 번이고 "내 집에서 나가라!"라는 말을 듣고, 의절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경제력으로 아이를 압박하면, 경제력이 없는 아이는 무릎을 꿇는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도 또 한 번 나온 이런 고성이었고, 나는 그날로 고시원을 잡고 나왔다. 한 달만 살아보고 돌아오라고, 고생이란 게 뭔지 알아보란 투로 한 마디 던지셨더랬다. 그 후로 벌써 2년이 훌쩍 넘어갔다. 다행히 나는 지금,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버텨내고 있다. 풍족하진 않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아버지의 화두는 언제나 하나였다. "부모가 자식 잘못되라고 하는 일이나 말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굴복시켜서라도 끌고 가고 싶으셨던 거다. 독한 소리를,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어가면서라도 바르게 키우고 싶었던 거다. 나는 그래서 삶의 기조를 이렇게 잡고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은,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주기 위해서라도 결과적으로는 잘못되어 있을 수 있다고. 나는 그게 두려워 아랫사람에게도 쉽게 마음을 터놓지 못한다. 내가 타인에게 먼저 말을 놓는 경우조차 극히 드물다. 그래서 많이 지적을 받는다.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긴 하지만 속에선 거리감이 있다고. 다가설 수가 없고, 무섭다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참 분에 넘치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그러나 그 사랑은 독을 바른 사랑이었다. 누구도 자기 자식이 잘못되길 바라진 않는다. 다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것까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잘못되게 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현재 내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 사랑받았으되 사랑으로 느끼기엔 지나치게 괴로웠노라고. 그래서 결국 그건 사랑일 수가 없었다고. 그리고 그로 인해 남은 상처와 지치다 못해 반쯤 망가진 몸뚱이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가 됐다고.
자식이나 되어갖고 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단 소리를 하는 건 후레자식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나는 해야 한다.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지금에야 '이해'라 할 뿐, 실은 겪을 필요가 없는 고통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으니 그조차 감사해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역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 뿐이다. 나만의 문제겠는가. 당연히 동생도, 내 어머니도 그만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젠 부딪치지 않는 방법도 알고, 이해도 하지만… 용서하긴 어렵다. 다만, 잊은 척할 뿐. 잊을 뿐. 그러지 않고선 앞으로 걸어나갈 수가 없으니까. 살아갈 수 없으니까.
이젠 그저, '남들에게는 자랑스러워 한다는 아들놈'(아버지 친구분들의 증언) 같은 거 말고, 있는 그대로 보통의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화목과 사랑을 그릴 뿐이다. 힘들겠지만.
그리고… 난 여전히.
누군가에게 온전히 내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아직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으로 우러난 사랑한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할 수 있을까.
연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독이 아닌 사랑을?
아직은 꿈도 못 꿀 것 같다. 그저 끌어안을 상대를 갈구할 뿐.
나 또한 수컷의 궤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책 한 권이 별 상념 다 들게 한다. 괴롭구나.
# by 서찬휘 | 2008/04/05 20:41 | 트랙백 | 덧글(0)
2008년 03월 29일
http://mahn.co.kr/chathttp://mahn.kr/chat둘 중 하나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만』 개편 이후 첫 원두막이네요. 이야기가 고프신 분들 누구나 들어오시길.
# by 서찬휘 | 2008/03/29 00:04 | 트랙백 | 덧글(0)
2008년 03월 19일
『만』 필진인 CARPEDIEM 님이 이번에 시드L노벨 번역작가에 응모하셨어요.
부디 철썩 붙으시길! 마음을 담아 응원합니다.
# by 서찬휘 | 2008/03/19 17:12 | 트랙백 | 덧글(3)
2008년 02월 29일
만화 중심의 대중문화 언론 『만』 마스코트의 설정작업을 위해 여는 원두막(채팅실)입니다.
왼쪽의 '손님' 부분에 자기 이름이나 필명을 적어서 변경하신 후 오른쪽에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 종료. 긴 시간 이야기 나눠주신 많은 분들 고맙습니다.
참고로 은지의 현재 그림은 다음과 같습니다만, 처음부터 다시 작업할 예정입니다.





# by 서찬휘 | 2008/02/29 22:29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