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잔치, 일은 놀이

고교 시절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문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수업을 고등학교 특유의 대학 입학용이라기보다는 대학 강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행하셨던 터라 당장 점수 올리는 데에 급했던 친구들에겐 그다지 인기가 없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에 담긴 상징적, 근원적 의미를 제시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셨던 분입니다.

졸업 전,
이 선생님은 손수 붓글씨로 쓴 글씨를 A4용지에 복사해 제자들에게 나눠주셨었습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글자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삶은 잔치, 일은 놀이’라고요.

고등학생이란 풋사과 주제에 스스로는 알이 다 굵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나이.
이런 류 경구에 담긴 표현이 딱 와 닿을 리가 없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저 여덟 글자가 담고 있는 뜻이
가슴 속을 점점 더 크게 울려옵니다.

삶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일이란 싫은 걸 억지로 할 게 못 된다.
너무나 단순한 진리지만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은 채
심심하면 ‘아이고 죽겠다’ ‘나보다 힘든 사람 있나’ 소리를 입 밖에 내뱉으며
세상을 비관하고 한탄하곤 합니다.

저 또한 마감에 쫓기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낮밤을 뒤바꿔 사는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엔가 일이 말 그대로 ‘하루 밥벌이’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던 그 때,
가슴 속에 내려앉아 딱딱하게 굳어가던 독을 풀어준 게
문득 떠올린 저 여덟 글자 - ‘삶은 잔치, 일은 놀이’였습니다.

물론 힘든 게 힘든 게 아닐 순 없겠고, 싫은 게 싫은 게 아닐 순 없겠지만
마음이 일을 부르고,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이상
죽겠다는 심정으로 살아간다면 죽겠다 싶은 일만 하며 죽어 가겠지요.
재밌게도 마음이 바뀌니 시야가 확 바뀌더랍니다.

잔치란 기쁜 일을 맞아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노는 거고요.
놀이는 즐겁기 위해 하는 모든 겁니다.
혼자 힘든 게 아닌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삶, 스스로 즐겁게 벌이는 일.
덕분에 전 힘들어도 웃으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졸업과 함께 퇴직하셔서 이후에 따로 찾아뵙진 못했지만
이 문구를 볼 때면 새삼 다시 떠오르네요.
삶은 잔치요, 일은 놀이라는 가르침,
어른이 된 지금 가슴 속 깊이 감사히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 모처에서 글 한 편을 부탁받고 일전에 썼던 걸 보내놓고는 성격에 안 맞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따로 하나 써 둔 게 이 글입니다. 근데 정작 담당자에게선 이전 글이 '짧아서 더 좋네요'란 답을 들었군요. 고로 이건 그냥 블로그에다 슥삭. 어디에 실릴 건지는 올라오면 공개할게요.

by 서찬휘 | 2008/05/02 14:21 | 삶의 흔적들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seochnh.egloos.com/tb/174999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