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의 우문현답

한 모자가 서점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엄마는 3,40대 쯤으로 보이고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쯤인 듯한데… 애 엄마는 애가 골라온 책을 보며 이맛살을 있는 대로 구긴다. 아이는 만화가 섞인 책을 골랐었던 모양인데, 엄마는 얼른 도로 놓고 오라고 잔뜩 핀잔을 준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던 듯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혀를 차며 제 자리에 돌려 놓고 온다.

참고서 류의 책을 계산하며 엄마는 아줌마다운 핀잔을 준다.

"만날 만화같은 것만 보지? 책을 봐야 할 거 아냐!"

만화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짜증이 인 것도 잠시, 이 말에 대한 아이의 대답을 듣곤 그대로 엎어졌다.

"괜찮아. 나한텐 도움 돼. 나한텐 도움 되니까 괜찮아."

아아. 이런 걸 두고 우문현답이라고 하는 거다….

순간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했다. 괜히 만화가 책이네 아니네 같은 걸로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 아이를 앞에 두고 '만화'와 '책'의 경계를 일부러 그어주는 바보 어른 앞에서 역시 그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보짓을 해 봐야 바보일 뿐인 거다. 요점은 그거다. 그 만화는, 내겐 양식이야. 도움이 돼. 그러니까 난 이걸 읽어도 돼. 괜찮아. 아이는 그 말을 바보 같기 이를 데 없는 어른들에게 던졌다. 애 엄마도 이 말에는 대답을 채 못했거니와 속으로 잠시나마 배알이 꼴렸던 나도 뒷전에서 부끄러움에 떨어야 했다. 이 아이는 자기 생각을 갖고 책을 골랐다. 그저 그 뿐인 것이고 그걸로 충분한 거다.

새해 첫날부터 얼결에 지나가던 신승에게 선문답을 주고받고는 문득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핵심을 보자. 그거면 된다.


그나저나 그 아이, 크게 될 놈이다. 똘망똘망하게 생겨 놔선.
이름도 모르는 아이지만 오늘 고마웠다. 좋은 걸 다시 생각하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

by 서찬휘 | 2006/01/02 00:57 | 만화/만화영화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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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까날 at 2006/01/02 05:01
호오 정말 현답입니다.
Commented by battler at 2006/01/02 09:09
그 아이의 영특함에 부모는 기뻐해야 할것 같네요.
핀잔을 주지말고 그 성향을 칭찬해 줬으면 싶네요.
Commented by skan at 2006/01/02 11:23
저기서 저런 대답을 할줄이야, 정말 대단한 아이네요.
Commented by 서찬휘 at 2006/01/02 20:32
대단하고 영특한 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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