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6년 2월 10일, 뭔 생각인지 끄적였던 잡글. 딴에는 소설의 일부.

[正統日食 靑島]. 월요일 오후 3시.

보통 이 시간의 일식집 [靑島]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시내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장사 안 된다는 소리로 들릴 법도 하지만, 딴에는 제법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정통일식'이라는 간판도 붙어있는 데다 평일 - 거기에 한 술 더 떠 지금은 점심시간도 꽤 지난 시간. 한 마디로 이런 음식점이 한 주말 저녁쯤이면 모를까, 이런 시간에 북적거리기는 어렵고 비싼 요리를 시켜먹는 사람도 만에 하나다. 그것도 혼자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만에 하나가 찾아온 모양이다. 나이는 20대 정도로 보이는데 그다지 차려입은 폼새도 없고 머리도 꽤 긴, 이런 고급 일식집 분위기와는 거리가 전혀 멀어보이는 남자 하나가 식탁에 앉아 요리를 먹고 있다. 혼자서, 그것도 무려 자연산 광어 1Kg에 초밥 세 접시다. 츠키다시까지 합쳐놓으면 꽤 되어보이는 양인데도 이 남자는 꾸역꾸역 목구멍 뒤로 삼켜넣고 있다. 그나마 게걸스럽게까지는 아닌데도 그냥 보고 있노라면 영락없이 '한 열흘 굶은 거지가 난데없이 호텔 뷔페를 만난' 꼬락서니다. 옆 의자에 놓인, 차라리 배낭에 가까운 크기의 검정가방에서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곤 하지만 대체 뭘까, 저 사람… 이런 시간에 광어니 초밥이니를, 그것도 혼자서 먹다니.'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왕가슴 종업원 아가씨는 그를 흘낏 쳐다보며 비워진 반찬 그릇들을 치웠다. 이상해, 암만 봐도 이상해. 조리장 님께 여쭈어봤더니만 평소와는 다른 조소와 함께 '몰라도 돼, 그냥 놔둬'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괴이한 반응에 당황하며 홀을 보니 회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한 상 가득한 반찬과 회를 분별없이 그리고 바지런히 집어삼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마치 구간반복마냥 계속되고 있다.

알밥이 맛있다고 한 그릇 더 달라고 하는 그를 보면서 돈은 있으려나… 하는 걱정도 슬그머니 드는 순간, 현관에 붙은 종이 딸랑거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 생략. 괜히 트집잡는 녀석들 */

"음식이 조리되는 곳은 홀이 아냐, 주방이다."

조용하지만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저음이 홀에 울려퍼졌다. '빈말로라도 초대받지는 못할 손님들'은 눈 앞에 박힌 회칼의 진동과 낮은 음성의 절묘한 하모니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음식에 불만이 있으면 주방장인 나한테 말해. 아니면… 네놈들이 몸소 요리 재료가 되어 줄테냐?"

노려보는 시선은 '그거라면 지금이라도 가능한데'라는 말을 이어서 해 주고 있었다.


"여전하네요. 이래서 장사는 되겠어요?"
어찌나 세게 박혔는지 아직까지도 서슬퍼렇게 식탁에 꽂힌 회칼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청년은 여전히 먹성좋게 음식물을 집어삼키며 씨익 이죽인다.
"흥. 제놈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야. 어차피 본 사람도 몇 없고. 꼬리내린 개 따위 - 정신박힌 놈이라면 그런 짓 못할거다. 그리고 버는 거 걱정할 만큼 여긴 후진 데 아냐."
역시 별 관심없다는 듯 받아치는 중저음.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덩치와 목소리에 압도당할 법도 하지만 은근히 장난감을 만진듯한 재미가 배어나오는 목소리다. 피차 그런 걸 잘 안다는 듯 청년은 막 다 비운 초밥 그릇을 청도에게 건넨다.
"뭐냐. 내가 네 전용 종업원이라도 되는 줄 아냐."
"에이 뭘 그래요. 설마 내 뒤로 파도가 쳐오고 온갖 오바질로 혀가 녹는 기분이야아아아 하는 걸 바란 건 아닐거고. 손님도 없는데 서비스나 좀 더 해주죠?"
무표정한 얼굴에 눈썹만 살짝 씰룩한다. 덩치 때문인지 앉은 자세에서 보니 형광등이 역광이 되어 왠지 화가 잔뜩 난듯한 분위기가 된다. 아가씨가 옆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표정을 풀지 않은 채로 청도는 물었다.
"몇 그릇째냐"
"초밥은 지금 두 접시 다 먹었고 회도 거의 다."
"꽤 받았나보군. 건수가 컸나보지."
"뭐 그럭저럭."
"얼마나 더 먹을거냐."
"초밥 한 접시만 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졌다-는 표정으로 조리장은 식탁의 회칼을 스윽 뽑으며 낮게 읊조린다.
"망할 놈의 꼬마. 얼른 먹고 사라져. 네놈의 고기로 육회를 떠버리기 전에"
"예이예이-"
관심 있다는 듯 없다는 듯 청년 - 먹을 때의 모습은 청년이라기보다도 완전히 소년같은 분위기로 돌아가 식탐에 여념이 없다. 대체 저 말라 비틀어진 몸 어디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모를만치.


주방으로 돌아온 조리장에게 종업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대체 저 사람 뭐예요? 괴상하게"
"그냥 놔 둬. 한 달에 한 번 여는 이벤트인데 방해하지 마"
"한 달?"
"아아. 저 놈 일이란게 그렇다. 한 달에 몇 번 볕을 볼까. 쳐박혀서 무언가를 쓰고 또 쓰고 만들고 붙이고. 먹을 것에도 신경을 끄곤 그저 쓰고 보고 읽고 하는 놈이지. 그러다 한 번 돈 들어올 때 저러는거다. 저 꼴에 폭식의 제왕이지."
"……."
말을 잇지 못하는 종업원 아가씨. 나이도 별로 많아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라는 표정으로 홀쪽을 바라보는 그네를 보며 조리장은 씹어내듯 내뱉는다.
"띠동갑인 주제에 이 나와 맞먹으려드는 괴상한 놈이지. 뭐 그런 놈이니까 저러다 죽든 말든 놔둬."
"묘하게 잘 아는 듯한 말투시네요?"
"응? 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 뜸을 들이며 회칼을 매만지는 조리장을 보며 희한하다 생각하는 종업원 아가씨. 그러나 조리장은 육중한 몸을 돌려 초밥에 손을 대며 지나가듯 역시 낮게 읊조린다.
"악연이라면 악연, 필연이라면 필연. 사는 세계가 달라도 저런 바보놈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꼬이게 마련이지."
"……?"
"바보는 바보를 알아보게 마련이니까. 자. 먹이나 갖다줘. 얼른 먹고 꺼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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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생각인지 그 날은 이런 게 쓰고 싶었다. 온갖 데에 들어간 패러디부터 시작해 문득 떠오른 캐릭터들을 써 보고 싶어서 마구마구 갈겨본 거다. 민망하기 이를 데 없지만 디렉토리를 뒤지다 발견한 녀석이 간만에 읽으니 꽤 웃겨서.

생략한 부분은 도무지 내 어휘에선 실감나는 욕지거리를 쓸 수 없어서 미뤄둔 것. 나중에 펜더 형에게 특강이라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나는 주방장이 말한 '바보' 부류들의 '일상'이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소설로 써 보고 싶다.
언젠가는.

by 서찬휘 | 2005/11/16 16:04 | 삶의 흔적들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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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피스이즈 at 2005/11/17 01:38
굉장히 재밌을거라고 생각합니다'ㅅ' 지금도 즐겁네요.
Commented by 여진 at 2005/11/17 08:21
주인공이 찬휘님 자신인 소설이네요?
Commented by 사도 at 2005/11/17 18:29
아- 재미있었어요. 저도 청년에서 찬휘님이 느껴졌네요.
나머지 이야기도 듣고싶군요*.*
Commented by 서찬휘 at 2005/11/17 21:00
아하하. 쓸 당시의(사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제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거죠. 그런 '바보'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그 때 제가 붙들고 있던 주제였거든요. 자연히 저 스스로를 투영하고 있었고요. 얼마 전에 쓴 원고에선 '그래 난 걷고 있다'라고 조금 더 나아가고 있긴 합니다만.

구멍이 잔뜩이지만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들.
Commented by 알비레오 at 2005/11/18 00:24
잘 보고 갑니다. ^^/
Commented by 사도 at 2005/11/18 04:02
"넌 이미 걷고있다..." (프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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