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부럽다.

한국 만화는 질적으로 쓰레기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신감이.
나는 차마 그런 말 내뱉지도 못하는데. 역시 나는 이 판에 서 있을 자격이 없나봐.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만화 이야기를 하겠어. 하려면 확실하게 찔러 줘야지?

…….
그냥 미숙아로 남을란다. 젠장.
방금 전에 잡지 보다가 눈물 흘리고 만 내 조막만한 감동을 돌려줘.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요즘엔 "잡지를 사 본다"고 하면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양 바라보거나 의무감 아니냐는둥, 돈 아까운 짓을 하고 있다는 둥 상당히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특히나 순정지도 아닌 소년지, 청소년지를 계속 사 본다고 하면 단박에 "볼 것도 없고 가치도 없는 쓰레기를 잘도 사 본다"는 반응이 돌아오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내겐 제법 중요한 의미를 준다.

다분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래. 개인적인 이야기다. 카탈로그니, 신작을 빨리 소개받을 수 있느니, 단행본 이전의 이야기를 미리 읽을 수 있느니, 정보를 얻을 수 있느니… 그런 이유 따위는 사실 내겐 의미가 사라진지가 오래다.

남들에겐 이해가 조금 안 될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갈 리가 없다. 다시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프로그래밍을 하고 그 프로그램을 굴릴 때면, 그리고 그걸 통해 사람들이 엮이고 데이터가 모이는 과정을 보고 있을 때면, 종종 나는 환각과도 같은 형상을 눈 앞에 그린다. 변수에서 변수로, 함수에서 함수로, 다시 루프에서 메인으로 돌아가는 그 모든 데이터들의 흐름이 혈관을 타고 몸 전체를 도는 피의 흐름과도 같이 느껴진다. 데이터는 흘러야 한다 - 내가 꾸려 나가는 모든 것의 기본 기조인데, 흘러야 할 것을 흐르게 하는 과정 자체를 나는 너무너무 좋아한다. 그 과정에 빠져 있을 때면, 그것들이 내뿜을 에너지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변수 하나를 놓고, 함수 하나를 그려 낸다. 하고 있노라면 정말 데이터의 흐름이 눈 앞에서 흐르는 환각과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글을 쓸 때인데, 어떠한 주장을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도 있겠지만 그 글을 이루는 낱말 하나하나 조사 하나하나가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가 별로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흘러다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부유하듯이. 내가 글을 쓸 때 느끼는 이 감정은 종종 탈고 직전에 위력을 발휘하는데, 잠시 쉬고 있느라 눈을 감고 있을 때 흘러다니던 낱말 하나가 유독 마음에 걸리는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문장 전체가 다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부분의 어디가 무언가 흐름에 어긋난다는 느낌이 드는 거다. 열에 아홉은 반드시 그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감인 줄만 알았지만,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느낀 건 나는 프로그래밍이나 글이나, 이론이나 체계와는 별개로 그저 무언가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는 것 뿐이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해 왔고, 또 그러기 위한 과정을 꾸리는 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다.

그럼 잡지는 어떨까.

만화 잡지는, 만화계에서 내게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그래서 버릴 수가 없다. 자연스레 손이 가게 된다. 흐름을 깰 정도로 다소 엉망인 녀석들은 물론 안타깝고 손을 떼더라도, 아직까지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 여길만큼 엉망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젓는다. 단순히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어떤 부록이 나오고… 이런 건 사실 의미가 없다. 우선은 흐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의무감이니 돈이 많아서니도 사실은 웃긴 소리다. 내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에 투자하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는 거니까.

여전히 잡지들을 보는 건 즐겁다. 그리고 오늘만 하더라도 난 이번 호 이슈를 보고 정말 감동받고 말았다. 물론 작가의 역량에 기대는 건 있긴 하지만, 그렇대도 그런 무대를 제공해준 건 어디냐고.


..............


물론 이런 건, 몇 번이고 말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고 감상이며 방법이다. 그러니 굳이 필요성을 못 느낀다든지 가치를 못 느끼겠다든지, 한국만화 쓰레기인데 관심 더 두는 게 이상하다든지 하는 사람에게 권할 생각도 없거니와 설득할 생각도 없다. 단지 이것만은 알아뒀으면 좋겠다.

뭐든 그렇다. 어떤 것에 대해 가치를 '있다'라고 칭찬하고 좋아해주는 것엔 가치가 있지만, 무조건 가치가 '없다'라고 몰아붙이는 말에는 정말로 가치가 없다는 것. 가치란 일종의 값이다. 값을 매기는 것에 '인색'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건 공짜로 줘도 안 갖는다며 침을 뱉는 건 명백한 비난이다. 비판은 또 다르다. 일전에 누군가가 명언을 남겼다. 비판은 잘 되라고 욕하는 거지만, 비난은 죽으라고 욕하는 거라고. '가치 없다'는 비난에는 가치가 없다. '좀 잘 해 보라, 이래서 안 된다'고 이것저것을 지적하는 비판은 그래도 유효하다. 그런데 비난을 비판으로 종종 착각하는 이들은 비난의 강도가 높아야만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가치가 그냥 없다는 것도 아니다. 듣고 있노라면 그딴 것들을 돈 주고 사 보기씩이나 하고 있는 내 행위마저 함께 매도당하는 느낌이다. 뭐랄까, 악덕업주에게 당하는 불쌍한 소비자들을 구제해줘야 한다면서 발벗고 나서고 있는 시민운동가들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보다. 아 그래, 딱 그런 느낌이다. 나는 불쌍하고, 자신들은 불쌍하지 않으며, 이딴 걸 찍어내는 출판사나 작가들은 개새끼들이다. 응당 구해줘야 하는데 되레 불쌍한 것들이 안 불쌍하다고 찍찍대니 불쌍해 죽겠다. 얼른 구해줘야 하는데 멍청해서 말도 못 알아듣는구나. 딱 그런 느낌이네. 아, 나는 불쌍했구나. 정말정말 불행한 소년이었구나. 그래쿠나 무서운 꾸믈 꾸어꾸나.

내가 흐름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기는 매체에 대해 가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나로서는 속상하고, 조금 더 같이 봐 줄 수 있는 아량과 여유를 지녀주길 바라긴 하지만… 그걸 일일이 들고 다니면서 보라고 할 수는 없는 일. 다만, 보지 않으려면 관심도 두지 말았으면 싶은 거다. 그리고 이건 비단 잡지 뿐 아니라, 만화도 마찬가지다.

한국만화에 절망한다고? 질적으로 쓰레기고 제대로 해 낼만한 이들이 없다고?
나는 이 고매하다못해 영롱한 발언들에 울고 싶어진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독한 비현실을 강요하는 그 폭력성에 가슴이 아프다.

단순히 내가 수준이 낮아 수준 낮은 걸 보면서도 너무 즐거워하는 것 뿐인 것이라면, 차라리 수준 낮게 살다 죽으련다. 양반님들 기준으로 수준 높은 게 뭔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말하자면….
내가 만화를 보면서 괴롭고 슬픈 건 우리 만화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있는 것조차 이렇게 대놓고 엿 먹이면서도 멀쩡할 수 있는 '너무도 수준 높은' 우리네 독자 수준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수준 낮은 걸 그냥 저냥 봐 주고 칭찬해 줘버릇하니까 기고만장한거야" 우리 독자들은 너무도 수준이 높아서 그럴 자격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수준이 낮아서 그럴 수가 없다. 잘났다. 실컷 짖고 실컷 물어뜯으라. 당신들이 말하는 질과 수준은 당신들이 입을 열수록 높아가긴 커녕 떨어져갈 것이다. 상처입어가면서 말이지. 어쩌면 당신들은, 그 매커니즘을 빤히 알면서도 떠드는 건지도 모른다…. 떨어져 보여야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찬양하라고, 혹은 잘 그리니 사 줘야 한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이만큼도 없다.
칭찬해줄 수 있는 것에 칭찬을 아끼지 말자고 하는 것조차 위선이라고 하지만 마라.
칭찬해줄 수 있는 것에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는 것조차 고개를 돌리지만 마라.
최소한….
있는 것조차 없다고 고개돌리면서 수준과 질을 논하진 말란 말이다.

좋아하는 거, 웃어가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게 현실인데 뭔노무 현실을 또 들이대면서 그리 걱정을 다 해 주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쩜 그리 정치판하고 똑같을까? 조선일보가, 한나라당이 제아무리 국민이니 서민이니를 들먹이며 나라 다 망한다고 엄살을 부려도 시대는 계속 흘러가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영 다른 형태로. 어쩌면, '안 되어야' 자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다. '없다'고 할 양이면, 만화판 걱정은 물론이거니와 작품과 작가의 질이니 수준이니를 걱정하지도 말아달라. 눈 앞에 놓인 낫을 놓고도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낙을 볼 수 있을지 정말 의문이니까.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돌아와서 보자면.
왜 한국만화는 팔리지 않는 걸까?라는 질문을 놓고 봤을 때.
질이 쓰레기라서 안 팔리는 거지!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저렇게 자신있게 오만방자한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일 게다. 재밌으면 잘 팔린다라는 단순 도식은 과연 현실적일까? 우습게도 '아니오'다. 물론 잡지사 기자가 할 수 있는 말의 범주이긴 하지만, 이론가, 연구가, 논리가, 비평가, 교수같은 입장에서는 이렇게 단순무식하게 말하면 단순무식하다고 욕먹어야지.

재미(웃겨야 하는 재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물론 당연히 알아야겠지만. 슬퍼도 재미인 거고 강동받아도 재미인거다!)란, 글에서 '논리'가 그렇듯 '그것만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성립하기 위해 전재해야 할 기본 조건 중 하나인 거다. 그것만을 문제삼을 줄밖에 모른다면, 정작 자신의 불감증을 탓해야지 남 탓할 게 아니지 않은가.

현실은 시스템의 부재라는 이름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그러나 쉽게 풀자면.
각자가 해야만 할 걸 안 하고 있어서라는 답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엔.
받아먹기만 하려 드는 자는 제외다.
재미타령 이전에 재미를 느껴보려고나 해 봤는지, 그거나 좀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좀 봤다는 작자들조차 아 요즘은 강경옥 씨 레벨의 작가가 하나도 없어서 볼 생각이 안 들어같은 소리를 해대고 있는 판국에, 뭐가 그들을 만족시키랴. 소년지, 청소년지에 권가야 같은 작가가 없는데 뭘 보겠냐같은 소리를 해대고 있는 판국에, 뭐가 그들을 만족시키랴. 수신할 수 있는 주파수가 한 채널 뿐인 구식 트랜지스터 라디오같은 성능을 지녀놓고선, 만족할 수 없다며 화를 내고 있다니 그 꼴이 너무 우습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도 체위 한 번 바꿔보지 않고선 오르가즘 못 느꼈다고 짜증내는 남정네같은 형국이다. 추하지. 이쯤되면.

나처럼 해 봐요 요렇게-라고 할 양은 없다.
단지 난 이렇다.
흐름을 느끼는 것만으로 즐겁다고.
당신들은 불행한가보다.
난 즐겁다. 재밌다.
그럼, 내가 병신인가, 당신이 불감증 환자인가.
내가 그저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자위행위나 하고 있을 뿐인 건지, 당신들이 너무 현실을 냉철히 보고 있을 뿐인 건지.

알아서 판단하시라. 다만 나는 수준 낮대도 행복하고 싶다. 지금도 즐겁고.
행복은 전파해도 되지만, 불행은 전가해선 안 되는 거다.
당신들이 불행해하든 상관없지만 그걸 남에게 전가하진 마라.


생각나는 대로 유치하기 이를 데 없이 마구 내지르는 건 여기서 끝.

by 서찬휘 | 2005/07/15 01:22 | 만화/만화영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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